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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생은 졸업 42일을 앞두고 모교 권세일 교장선생님이 당시 목포국회의원 임기봉 의원을 통하여 정긍모 해군제독에게 부탁하여 처음으로 1953년 2월 6일 해군본부소속 LST에서 승선실습을 시작하였다.

이때 1기 실습생은 12명이었다. 12명은 LST에서 6개월 승선실습 후 또 다시 2차로 1953년 10월 19일부터 1년 6개월동안 10명은 대한해운공사, 1명은 근해상선, 1명은 태창산업으로 승선실습을 나갔다. 사실 그때부터 부산 중앙동에 목포해양대가 뿌리를 뻗기 시작하였다. 승선실습 중 1기생들의 입장은 부산에 입.출항은 잦고, 고된 항해를 마치고 부산에 입항을 해도 일가친척이 없어 갈곳도 없는 외로운 처지였고, 또 배에서 직위는 실습생으로 춥고, 배고프고 가난이 전부인 빛 좋은 마도로스였다.

1기생 15명의 졸업생 중 해기면허시험은 1957년 9월 26일 1차로 4명이 합격하였고 그후 1명이 또 합격하여 본교 개교이래 처음으로 항해사 5명이 탄생되었다. 그후 점차 2기생, 3기생, 4기생, 승선실습생 수도 늘어나고 졸업생도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승선희망자는 선박회사가 많은 부산 중앙동을 찾게 되고, 또 승선자는 부산에서 입.출항을 많이 하게 되어 자동적으로 부산 중앙동에 동창회원 수는 날로 늘어갔다. 어느 때부터인지 무서웠던 부산이 친근한 부산항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또 승선 실습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도 계속 부산을 찾게되니, 선배들은 후배들이 많아져서 양어깨에 힘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동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니 부산에서의 생활도 서로 도울수 있어서 외롭지 않게 되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부산에 있는 동문들이 동창회 결성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이에 성질이 급한 누군가가 서둘러 오늘날 동창회의 태반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격식과 규정의 틀이 없이 몇몇의 모임이 동창회의 전부였다. 1기 졸업생부터 5기 졸업생까지 졸업생 전부를 합해 보아야 227명 뿐이었고, 그중에서도 승선을 할려고 부산을 찾는 졸업생은 겨우 50명 정도에 불과했다.

초창기의 모임은 오늘날의 동창회와 같이 모교를 돕고, 장학기금을 마련하는 등 거창한 것이 아니고, 외롭고 배경없는 부산바닥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힘도 기르고 승선정보도 교환하여 졸업생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승선시키기 위한 정보 교환을 위한 친목회 형식이었다.
 

처음 모임부터 회칙을 재정하여 공포하고 회장단은 물론 운영위원까지 구성하여 동창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 후 1기 손석현 동문과 2기 이준헌 동문이 주축이 되어 회장직을 맡으면서 점점 동창회의 기틀이 잡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떳떳하게 동창회의 이름으로 모교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여 표창과 상품을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39년전인 1960년 5월 31일에는 9기생들이 앞장서서 전교생을 인천으로 이동시켜 놓고, 모교를 인천으로 옮겨달라는 장기간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도중, 동창회 대표(1기 손석현회장외 3인)는 교육부 수석장학관과 학생 대표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등 모교의 각종 사건사고에도 참여하여 해결함으로써 동창회와 모교간에 긴밀하고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또 후배들에게 애교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장학생을 선발하여 장학의 수혜를 베푸는가 하면 동창회원 관리를 위해 동창회원 명부를 발간하고 한마음 한뜻의 둥지인 동창회관을 마련하였다.
더구나 1977년 5월 31일에는 영산강을 안고 해돋이를 바라보는 모교의 정문에 “모교를 들어오고 나가는 후배는 동창회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의미에서 해기 (海技) 역군을 성장시킨 관문의 역할을 하게될 모교의 교문을 무거운돌로 건립하여 모교에 기증함으로써 본격적인 동창회 사업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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